제목 : 김 근 수 (40회) 상주시장 등록일 : 2005-05-23    조회: 901
작성자 : 사무국 첨부파일:
“100주년 계기‘전국 명문’거듭났으면”

교풍 바뀌어도 전통은 그대로 … 긍지 잊은 적 없어

김 근 수 (40회) 상주시장

상주는 옛부터 삼백의 고장이라 하여 쌀, 누에고치, 곶감으로 유명
하다. 또한, 세조대왕이 문무시종과 함께 시를 읊었다는 문장대와
1,300리 낙동강 長流중에 가장 경관이 빼어나다는 경천대를 비롯하
여 천혜의 관광자원과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문화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 아름다운 고장을 가꾸고 지키는 중심에 3선의 민선시장 김근
수 선배님(40회)이 있다.

목민관으로서의 다망한 공무 때문에 선배님을 만나는 길은 수월하
지 않았다. 약속을 정해 놓고 달려간 날은 산불 때문에 헛걸음을 하였
고, 겨우 일정을 조정하여 잠시 만나고 올 수 있었다.


김근수 선배님의 고향은 상주 내서면 능암리다. 선배님은 약주
공장을 하는 집안 덕분에 비교적 여유롭게 소년 시절을 보내고 서
울 보성고등학교로 일찌감치 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
나 서울에서 생활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1학년 때 바로 6.25가
발발한 것이다.

피난민 학생으로 대구에 온 선배님은 계성고등학교로 전학
을 하게 되었다.당시 피난 온 학생들은 대구에 있는 각급 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보성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대륜학교에 배정을 받
았으나 선배님은 명문 사학으로 이름이 높았던 계성학교를 자원
하였고 마침 집안과 친분이 있었던 변정수 선생님의(당시 교무주
임)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한글 반포 기념 웅변대회가 키네마 극장에서 있었지. 그때는
경북고등 학생들이 각종 상을 휩쓸 때였어요. 그런데 내가 처음
으로 상을 탄 거야. 전학을 오자마자 바로 각광을 받은 셈이지.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의 관심도 얻게 되었어요. 우리집은 불교
집안이었는데 학교가 미션 스클이어서 처음에는 무척 난감했어.
그런데 교목으로 계셨던 이목사님과 오목사님이 정말 잘 대해
주셨어요. 신태식 교장 선생님도 다정하셨고.

아마 그때가 크리스마스 전후쯤이었는데 학교 연극반에서 성
극을 하게 되었지. 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나는 고아원 원장역
을 맡게 되었어. 마침 대구에 피난 내려왔던 연극인 이해랑, 김
동원 선생님이 직접 지도를 하셨지. MBC 아나운서였던 최창식
군도 함께 연극을 했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전쟁이 한창이어서
군에 입대한 동기들이 권총을 차고 학교에 등교해서 깜짝 놀라곤
했었는데 세월이 유수라더니 어느새 50년 저쪽의 기억들이구
만.”

선배님은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대구에서 개교 중이던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특차로 입학하였다. 그리고 졸업 후 군복
무를 마치고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 공채 직원으로
임용되어 두루 요직을 지냈다.

그후 1985년에 국가안전기획부 국내담당 제1차장을 거쳤고 5공
화국 때인 1986년에 국가보훈처장관에 올랐다.

“13대 국회의원 선거였지. 고향인 상주에서 민자당 지구당을
맡게 되었어요. 선거기간이 불과 한 달 정도밖에 없었지. 그런데
도 고향 사람들의 적극적인 격려로 당선이 되었어요. 40년 가까
이 객지를 떠돌다가 비로소 고향에 돌아오게 된 거지.”

“13대 국회 때는 동문들이 여섯이나 있었어요, 김용태, 장영
철, 정창화, 배성동, 김종기 의원 그리고 나 이렇게 여섯이야. 그
런데 김종기 의원이 이러는 거야. 선배님, 학교로는 후배지만
국회의원은 제가 선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웃으며 김의원 자네
가 선배 맞다. 그랬지. 김종기 의원이 3선 의원이었거든. 그때는
서로들 참 각별했어요. 동문이 그래서 좋은 거야. 서로 배려해
주고.”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선배님은 쉴 틈도 없이 처음 실시되는
민선 초대 기초단체장 선거에 출마했다. 당연히 당선의 영예를
안았고, 1998년에 2대, 2002년에 3대에 당선되어 어느새 상주
시장에 취임한 지 10년을 맞았다.

“지내고 보니 모든 일들이 다 의미가 있었지만 아침저녁으로
직접 시민들을 만나는 일이 가장 보람된 것 같아요. 장관도 맡아
보았고 국회의원도 지내보았지만 솔직히 국회의원은 경우에 따
라 헛말을 할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시장은 그럴 수 없어요. 돌
아서면 바로 표시가 나니까 진실하지 않을 수 없어. 무엇보다도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이고 또 나를 믿고 밀어주신 분들에게 보답
을 해야 하니까 헌신으로 소명을 다하려고 하고 있지.”

“지난 98년이었을 거야. 큰 수해로 상주 지역에서만 20여명의
사상자가 났을 정도였지. 참 참담했어요. 피해액이 180여 억에
달했는데 총력을 다해 복구 예산을 350여 억원이나 투입하여 길
을 내고 다리를 놓았지. 그야말로 원상복구를 한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개량복구 제도를 도입한 셈이지. 그 결과 큰 수해의 아
픔은 입었지만 상주가 10년을 더 앞당겨 발전하게 되었다는 평
가를 받게 되었어요.”

“상주는 원래 농업의 고장이야. 과거에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이 강원도내 전체보다 더 많았다고 했었지. 그리고 곶감 농사
도 대단해요. 지난해 매출이 630억에 이를 정도니까. 그런데 농
사만 가지고는 시 전체의 재정이 약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
러 가지 변혁을 꾀하게 됐지. 그가운데 하나가 대체의학으로서
성장 잠재력이 큰 한방산업단지 조성사업이야. 그리고, 상주가
자전거의 고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생활 자전
거만 해도 8만 5천대가 넘게 움직이고 있어요. 자전거는 우선
건강에도 좋고, 환경에 좋고 에너지 절약에 좋고, 교통문제까지
해결해 주고 있으니 백익무해의 보배인 셈이야. 그래서 청정 도
시, 환경 도시를 이슈로 하는 축제 산업을 추진하고 있지.”

“홍후배가 대구서 상주에 올때 느꼈겠지만 중부고속도로가
뚫렸고 97년도에는 상주-청원간 고속도로가 완공되어 이제 상
주는 사통오달의 교통의 중심지가 됐어요. 앞으로 지켜보면 알
겠지만 쾌적하고 활력 넘치는 상주를 기대해도 좋을 거야.”
선배님의 자신에 찬 말씀을 듣고 나니 상주 시내에 들어섰을
때 유난히 많았던 자전거 행렬이 떠올랐다. 그리고 대구 톨게이트
에서 한 시간만에 시청 마당에 들어설 수 있었던 걸 생각하며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상주의 특산물인 감식초로 잠시 목을 축이고 난 후 선배님의
가족상황을 들어보았다. 2남1녀중에 큰아들은 연세대 의대를 나
와 현재 서울에서 개업을 하고 있고, 딸은 이화여대를 나와 출
가하였는데 사위가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막내아들은 모스크바 대학에서 고전
문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고려대와 부산대에서 강의를 맡고 있으
며, 며느리 역시 모스크바 대학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였다고
했다. 특히 선배님의 부인께서는 이화여대 불문학과 출신으로 연
전에 방송통신대 일본학과에 편입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으며 중국관계 무역회사를 경영한 적이 있으나 지금은 선배
님의 내조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고희를 훌쩍 넘겼음에도 선배님의 낯빛에 윤이 넘치고 음성도
낭랑하여 그 비결을 물었더니 고향의 푸른 산 맑은 물을 찾아 가
끔 산행을 나서며 틈틈이 직원들과 즐기는 테니스 덕분이 크다고
했다.

“요즘 교육평준화다 뭐다 해서 모교의 교풍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교풍은 바뀔 수 있겠지만 전통은 사라지
지 않아요. 오랜 역사, 빛나는 전통은 소속감과 긍지를 심어주지
요. 나는 계성고등학교 출신이라는 긍지를 한번도 잊은 적이 없
어요. 개교 100주년을 맞게 되는 계성을 생각하면 가슴 뭉클한 자
긍심을 느껴요. 100주년을 계기로 모교와 동창회가 하나의 끈이
되어 영남사학을 넘어 전국의 명문학교로 큰 영광을 재현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동문들 모두가 나보다는 너를 생각하
고 너보다는 우리를 더 많이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하겠지요.”

짧은 대담 중에도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선배님을 붙
잡고 있다는 민망함이 컸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자 따뜻하
게 손을 잡으시며 내년에 큰 행사장에서 다시 보자고 하신다.
선배님의 말씀대로 사통오달로 열린 청정 도시 상주에서 대구까
지 돌아오는 길은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담 및 글 ·홍억선(6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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